▲ 이대호(작가)

며칠 전, 약을 사기 위해 동네 약국에 들른 적이 있었다. 약국에 들어서자 조금 뒤, 약국의 출입문이 열리면서 내 뒤를 따라 두 사람이 또 들어왔다.

젊은 여인과 중학생쯤 된 소녀였는데 그들의 대화 내용으로 보아 두 사람은 곧 모녀 관계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약국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엄마가 큰소리로 딸의 눈치를 흘금흘금 살피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을 때 그 애 말인데, 그 애는 너보다 훨씬 키가 작더라.” 엄마의 말에 소녀는 금방 기분 상한다는 듯 낯을 찡그리면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피이- 엄마는 번번이 나보다 작은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런 말을 하더라.”
“아니래두. 얼른 보기에도 너보다 나이도 많은 것 같던데, 너보다 키가 작던 걸.”
“피이, 다 그만둬! 그런 말 듣고 내가 기분이 좋아질 줄 알았어?”

소녀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엄마를 향해 눈까지 흘기면서 투덜거렸다. 딸의 투덜거림에 엄마는 조금은 민망해진 얼굴로 약사를 향해 약을 주문하고 있었다.

“키 크는 약 있죠? 효과가 아주 좋은 약으로 하나만 주세요.”
모녀가 옥신각신 하면서 신경전(?)을 벌이는 소리에 나의 시선은 나도 모르게 소녀에게 쏠리게 되었다. 소녀는 얼른 보기에도 아담하고 보기 좋은 체구였다. 내가 보기엔 결코 키도 작지 않았다.

“키도 작지 않고 체격도 아주 보기 좋은데 뭐가 그렇게 작다고 야단이니?”
평소에 남의 일에 여간해서는 참견을 안 하는 성격이지만 그 날은 소녀를 항해 나도 모르게 한 마디 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소녀는 보통 키에 너무 보기에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키가 큰 사람들은 작은 사람들에 비해 나이가 들면서부터 대부분 건강이 좋지 않게 될 가능성도 높고, 그래서 옛말에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까지 나오지 않았느냐는 쓸 데 없는 긴 설명까지 덧붙이게 되었다.

그런데 나의 장황한 설명은 곧 소녀의 엄마로부터 보기 좋게 묵살되고 말았다.
그리고 소녀 역시 내 말을 귓등으로도 받아들이지 않는 눈치였다.

“저 아저씨가 너를 위로해 주려고 하시는 말씀이란 말이야.”
게다가 이번엔 약사까지 웃음을 흘리면서 소녀의 편을 들고 거들고 나서고 있는 게 아닌가.

“그건 다 옛날 말이고요. 지금 세상엔 얼굴도 얼굴이지만, 우선 키가 커 보여야 이담에 취업할 때 면접관의 눈에 들게 된답니다.”

난 공연히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졸지에 무안을 당했다는 생각에 뒤늦은 후회를 해보면서 아무 대꾸도 못한 채, 민망한 웃음만을 흘릴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꼴불견이 된 느낌이었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고 먹기도 좋다’는 옛말이 있다. 그리고 ‘겉 볼 안’이라는 말도 있다.
모두가 공감이 가는 말들이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였다. 겉모양도 좋으며 그 속에 들어있는 내용물까지 알차며 맛도 좋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요즘은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속은 어찌 됐든 겉만 번드르르 하고 그럴듯하게 포장된 게 너무나 많아진 것 같다. 사람도 상품들도 모두가 하나같이…….

아마 그래서 특별히 성형외과가 날이 갈수록 호황을 누리는 세상이 된 것 같다. 그래서 겉모양만 교묘하게 슬쩍 바꾸고 명품이라고 팔리는 이른바 짝퉁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된 것 같다.

현재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교과서를 보면 한결같이 외형보다는 내실을 강조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본다면 교과서에서는 값진 옷을 지저분하게 입고 다니는 것보다는 바록 헌옷이라 해도 깨끗이 빨아 잘 손질해서 단정하게 입기를 권유하고 있는 이른바 근면 검소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일단 학교 교문을 나서기만 하면 그 모두가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정 반대이니 학생들은 과연 어느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한단 말인가! 혼란스럽기도 하고 모두가 엉망이 된 느낌이기도 하다.

오늘따라 근면, 검소, 저축을 강조하던 그 옛날의 시대가 새삼 그리워진다.
그러나 다시 그런 과거의 시절로 돌아가기엔 우린 너무나 까마득히 멀리까지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아무리 겉모습이 좋고 먹음직스럽게 생긴 떡!
그런 떡들을 실제로 먹어 보면 생각했던 것처럼 맛도 없고, 먹고 난 후에는 미처 상상조차 못했던 부작용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보기 좋은 떡만을 고집하는 것, 그것은 결코 ‘냉수 마시고 이를 쑤시는 일’ 그리고 ‘김칫국 마시고 수염 쓰다듬는다‘ 는 옛날 우리 속담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겉치례만을 중시하는 실속 없는 사람들이나 저지르는 실수인 것이다.

또한 그런 속 빈 강냉이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다는 현실이 그저 안타깝기도 하고 서글퍼진다.